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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 12 The Great Game 12: 관계의 악화

역사 위의 역사 HIS STORY

by Happy Sado 2021. 9. 22.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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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페르시아가 캅카스에서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코사크 부대의 전진은 멈추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탐욕스러운 눈길을 중앙아시아로 돌리게 되었다 이웃은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페르시아가 러시아군에게 짓밟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영국은 당황했다.

 

이번에 전쟁이 벌어지게 직접적인 원인은 조약의 문구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예레반과 세반 호수 사이의 땅이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러시아의 캅카스 총독 예르몰로프 장군과 페르시아의 황태자 아바스 미르자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이 결렬되면서, 1825 11 예르몰로프의 군대가 분쟁 지역을 점령했다.

예레반의 세반호수 : https://talistal.tistory.com/709
아르메니아 예례반과 세반호수 : https://blog.daum.net/yongok22/8067433

페르시아는 러시아가 아직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터키로부터 독립하려는 그리스의 투쟁에 말려들어 있었다. 게다가 1825 12월에 차르 알렉산드로가 급사하면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특히 군대에 심각한 무질서가 찾아왔다. 아바스 미르자는 무렵 터키와 싸워 거둔 승리에 고무되어 러시아가 무방비 상태일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경고도 없이 페르시아의 3 대군이 러시아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카스피 연안에 있는 요새 렌코란까지 수복했다. p153-154

 

새로운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즉시 예르몰로프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똑똑한 젊은 장군으로 손꼽히던 파스키예비치(Paskievich)백작을 후임자로 선정했다. 그는 지원군의 도움을 얻어 싸움의 흐름을 돌려놓았다. 오래지 않아 아바스 미르쟈는 연거푸 패배를 했으며 결국 현재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을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샤는 다급하게 무렵 조인한 방위협정에 의거해 동맹자 영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런던은 무척 당황했다...도울 입장이 되었다. 캅카스 내에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국은 여전히 공식 동맹자인 러시아의 일에 얽혀들고 싶지 않았다.

 

런던의 입장에서 테헤란과 협정을 맺은 원래의 목적은 페르시아를 건너오는 침략자로부터 인도를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협정에 따르면 그들은 샤가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그를 지원할 의무가 있었다. 샤가 공격을 경우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p155

 

그러나 페르시아만이 아니라 동양 전역에서 영국의 평판은 손상을 입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너무 겁내 친구도 돕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걱정스러운 일은 러시아도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러시아는 당시 터키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1828 투르크만치에서 맺은 항복 협정은 훨씬 가혹했을 것이다. 어쨌든 차르 니콜라이는 예레반과 나키체반 부유한 주들을 자신의 제국에 영구적으로 편입시킬 있었다. 페르시아는 강대국들의 정책만이 아니라 영국의 교활함에 관해서도 씁쓸한 교훈을 얻었다.

런던은 샤에게 자금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상당한 돈을 제공하면서, 샤가 공격을 당할 경우 영국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무 조항마저 포기하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페르시아에 대한 영국의 막대한 영향력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리고, 영국의 자리는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었다...러시아는 페르시아의 어느 곳에나 원하는 대로 영사를 있었으며, 러시아 상인은 특권을 누렸다.

1828 겨울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로 그리보예도프(Aleksandr Griboedov) 테헤란에 도착했다...그는 페르시아와 굴욕적인 항복 조건들을 협상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제 엄청난 전쟁 배상금 지불을 포함하여 항복 조건들의 충실한 이행을 감독하는 것이 그리보예도프의 임무가 되었다. p156

 

게다가 그가 1829 1, 거룩한 달인 무하람(Muharam) 테헤란에 도착한 것도 불행한 일이었다. 감정이 복받친 테헤란의 신자들은 검으로 자해를 하고 불이 붙은 숯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이런 식으로 이교도 러시아인들에 대한 증오는 발화점에 이르렀다. 여기에 불을 댕긴 사람은 바로 그리보예도프 자신이었다.

 

***무하람: 이란에서 수없이 열리는 많은 종교 행사 중에서도 일년 중에 가장 큰 종교 행사는 40일간 열리는 ‘아슈라(Ashura)’ 행사이다. ‘아슈라(Ashura)’는 이슬람력 첫 번째 달인 무하람(Muharram) 1월의 10일을 뜻한다. 이슬람력은 이슬람 세계의 전통적인 역법으로, 연호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그레고리력 622년 9월 20일(혹은 7월 16일), 즉 헤지라(거룩한 도망)를 원년으로 삼아 헤아린다. 조금 더 이슬람력에 대한 설을 풀어보면, 1월은 '알 무하람'이라고 부르고 의미는 '금지의 달'이다. 이슬람 이전부터 아랍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달에는 전쟁을 금지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시아파에서 가장 크게 기리는 '아슈라'가 이 달에 있다. 시아파 성지 각지에서 사람들이 운집해 3대 이맘 후세인을 추모한다.

이슬람 시아파 최대 종교 행사로는 ‘아슈라(Ashura)를 지칭한다. 아슈라(Ashura)는 아랍어로 ‘열 번째’를 뜻한다. 이란에서는 이슬람력 첫 번째 달인 무하람 1월 1일부터 10일까지 제3대 이맘(최고 성직자)인 후세인 이븐 알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슈라’를 기념한다. 이슬람력 1월인 무하람의 10일은 시아파의 이맘 후세인의 순교 기념일이다.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 때문에 후세인 (Husayn)이름은 이슬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아슈라’는 이슬람 창시자인 예언자 마호메트의 손자이자 시아파의 제3대 이맘 후세인이 680년 전투에서 우마이야조의 칼리프 야지드의 군대에 의해 암살당해서 순교한 것을 애도하기 위한 종교 행사이다. 암살당한 이맘 후세인이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 110 Km 지점에 있는 카르발라에 묻힌 것을 추모하는 행사인데 이맘 후세인의 기일이 종교 공식 행사로 제정된 것이다.
 
이슬람 제3대 이맘 후세인의 죽음과 함께 이슬람은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눠졌다. ‘아슈라’에는 매해 수많은 이슬람 시아파들이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추모지인 카르발라를 순례한다.  수니파인 탈레반등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인 무장 세력들은 시아파인 순례자 등을 향해 폭탄 테러와 자살 폭탄 테러 등을 감행해 ‘아슈라’ 기일 때는 매년 테러 경계가 강화된다.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에서는 ‘아슈라’ 행사 기간에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식으로 검은색 옷을 입고 쇠사슬로 자신의 가슴과 어깨를 치며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사를 한다. 이유는 후세인이 전사할 당시 온몸이 찢겨 암살되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슈라’ 행사기간에는 결혼식과 생일파티, 음악회 등 모든 즐거운 축하 행사가 제한되고 애도 기간을 가진다.  

 

이슬람력에서는 주로 초승달의 움직임을 보면서 각 날짜와 휴일을 공포하고는 하는데, 재밌는 건 천체 움직임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매달의 시작을 각국의 권위 있는 이맘들이 눈으로 초승달이 떠오르는 것을 직접 보고 선포하기 때문에 휴일 날짜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휴일을 예상하기 위해 그 즈음 되어서 현지 외신을 읽는 건 필수다.
 
무하람 1일부터 10일까지 가두행렬을 하고 고행 의례를 하는데 무하람 10일에는 이맘 후세인의 순교를 의미하는 수난극 ‘타지야’를 공연하고, 고행의 목적으로 체인이나 거친 야자 열매로 자신의 등과 가슴을 채찍질하거나 자해를 한다.  이는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카르발라 전투 당시 어려움이나 위험에 처해 있던 이맘 들을 지원하지 못했던 당시 사람들의 죄를 상징적으로 속죄하고 참회하는 죄의식의 표현이다. ***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7/09/20136/

 

강화조약에 따르면 이제 페르시아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원할 경우 고향으로 돌아갈 있었다. 이제 그들의 고향은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어 기독교적인 통치를 받았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가운데는 샤의 ***하렘에 고용된 환관과 샤의 사위의 하렘에 있는 젊은 여자 둘도 있었다... 샤는 소식을 알게 되자 즉시 그리보예도프에게 사람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차르의 외무장관인 네셀로데 백작만이 조약에 예외를 있으므로, 샤의 요청을 외무장관에게 전달하겠다면서 사람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혐오하던 이교도가 자신들의 군주를 모욕했다는 소문은 도시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물라들은 시장을 폐쇄하라고 명령하고 사람들을 모스크로 불러 모았다. p157

 

그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행진하여 그곳에 피신한 사람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그리보예도프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158p

 

한편 샤는 러시아의 무시무시한 보복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손자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 벌어진 사태에 대하여 혐오감을 표하고 깊이 사과했다. 젊은 왕자는 니콜라이가 맞아들이자 검을 자신에게 들이대며 그리보예도프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니콜라이는 여전히 터키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하고 성질 급한 페르시아인들이 성급한 행동에 나서도록 자극할 있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하물며 페르시아와 터키가 합세하여 대항하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159p

 

1829 여름 커다란 요새 도시 에르제룸이 파스키예비치의 손에 떨어져, 동쪽으로부터 오는 길이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와 동시에 술탄의 유럽 영토에서도 러시아 군대가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통하여 남쪽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바로 며칠 뒤에 러시아 기병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6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해협을 통제하여 오스만 제국이 깨지게 되면,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유럽 강국들은 남은 것을 놓고 싸움을 벌일 터였다. 그렇게 경우 유럽전체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아니라, 지중해 동부의 영국과 프랑스 기지들과 더불어 러시아의 남쪽 옆구리도 위협을 받게 터였다. 따라서 차라리 술탄이 쓰러져가는 제국을 유지하게 해주고 특권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쪽이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160-161p

 

에디르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1116018003

1829 9 14 에디르네(그때는 아드리아노플이라 불렸다)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비록 전함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상선이 해협을 자유롭게 통행할 있는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 이것은 지중해에 얼지 않는 항구를 갖는 다음으로 좋은 일이었다. 러시아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자유롭게 교역을 있었다. 나아가 술탄은 그루지야, 그리고 흑해의 중요한 항구를 포함하여 캅카스 남부의 중요한 항구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대가로 터키의 유럽 지역에서 점령했던 대부분과 더불어 요새 도시 에르제룸과 카르스를 돌려 주었다.

위기는 지나갔지만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공이 이끄는 영국 정부는 두려움을 느꼈다. 러시아는 아시아의 주요한 강국인 페르시아와 터키를 잇따라 물리치면서 캅카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그뿐 아니라 근동과 인도로 가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의 지배에 핵심이 되는 콘스탄티노플을 거의 점령할 뻔했다. 결과 러시아 장군들은 자신감에 가슴이 터질 같았다. 161p

 

조지 레이시 에번스(George de Lacy Evans) 대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직접적인 목표가 인도의 정복과 점령이라기보다는 영국의 인도 통치를 흔들어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인도회사의 임원들이 파산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원주민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원주민은 인도의 영국인보다 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에번스는 러시아가 카스피 해의 동해안에서 3 명의 부대를 히바로 옮길 있으며, 부대는 그곳에서 옥수스 강을 따라 올라가 발흐까지 것이라고 주장했다. 발흐에서는 카불을 거쳐 카이베르 고개까지 행군을 할터였다.163p

발흐(Balkh)의 위치

 

우연히도 그의 책이 나온 1829 가을에, 아프가니스탄의 족장이 차르 니콜라이에게 경의를 표하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그분 아니라 영국이 친구로 여기던 펀자브의 통치자 란지트 싱이 보낸 사절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찾아갔다고 했다.... 웰링턴 공의 내각 구성원인 엘렌버러(Ellenborough)경은 무렵 식민지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즉시 책을 테헤란의 동인도 회사 사절인 키니어 (그는 이제 귀족이 되었다) 키니어의 상관이었던 봄베이 총독 맬컴 경에게 보냈다. 164p

 

웰링턴 공이 걱정하는 것은 '해방'군이 진격을 하면서 원주민에게 영향을 주어 불안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침략군은 신속하게, 인도의 국경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접근로의 자세한 지도가 필요했다...

 

이제 엘렌버러는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가능한 모든 정보원으로부터 인도를 둘러싼 나라들의 군사적.정치적.지형적,상업적 정보를 수집했다. 카스피 해의 러시아 해군의 규모에서부터 이슬람이 지배하는 중앙아시아 한국과 러시아의 교역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관한 정보를 구했다. 그는 러시아 카라반들이 택하는 , 나아가 그들의 규모와 왕래 빈도도 알고 싶어했다. 165p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 대사 헤이티스베리(Heytesbury) 경은 첩자를 고용해 극비기밀문서의 사본들을 구했다.... 엘렌버러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부하들을 통해 직접적인 정보를 얻기로 결심했다... 젊은 인도군 장교, 주재관, 탐험가, 측량사들이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종횡으로 누비며 고개와 사막의 지도를 그리고, 강의 발원을 찾아가고, 전략적 특징들을 기록하고, 포대가 통과할 있는 길을 관찰하고, 부족들의 언어와 관습을 연구하고, 통치자들의 신뢰와 우정을 얻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어느 통치자가 어느 통치자와 전쟁을 벌일 계획인지, 누가 누구를 쓰러뜨리려고 음모를 꾸미는지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경쟁하는 제국 사이에 놓인 거대한 무인 지대를 러시아가 잠식하는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확인하려고 눈을 크게 떴다. ... 이제 본격적으로 그레이크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166-167p

 

 

 

*** 하렘: 하렘(아랍어: حريم harīm[*], 영어: harem) 이슬람 사회의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일반 남자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명칭은 금지된’(inviolable), ‘신성한’(sacred) 뜻하는 아랍어 하림(حرم, harīm)’ 터키어풍인 하렘으로 변용되어 ()이슬람 국가에 널리 알려지게 것이다.

외부와 격리되어 가족에게만 개방되어 있다. 예전에 이슬람교에서는 부인을 명까지 허용했기 때문에, 명의 부인이 함께 거주하는 하렘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다처제 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여성들도 예전보다 자유로워졌다. 따라서 지금은 몇몇 상류층 가문에만 하렘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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